도서분류 역사/문화/한국사/역사인물
도 서 명 백암 박은식 평전
부 제 명 국혼의 지사
지 은 이 김삼웅
출 판 사 채륜
정 가 19,000원
발 행 일 2017년 8월 30일
상세정보 양장, 318쪽, 국판변형(140mm×210mm), 높이 23mm
I S B N 979-11-86096-51-2 03910
‘국혼’이 무너진 시대
백암 박은식의 사상을 찾는 여정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박은식의 삶과 업적을 이야기한다. 박은식의 생을 좇으며, 그가 남긴 작은 흔적까지 놓치지 않고 살핌은 물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평론을 덧붙이고 있다.
박은식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국민계몽과 국권수호 그리고 민족독립에 생을 바친 분이다. 교육자이자 고대사연구가이면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의 생애는 ‘국혼사상’으로 귀결된다. 누군가 말한 ‘비정상적인 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박은식의 국혼은 민족의 ‘역사’ 그 자체이다. 국혼을 지키면 그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음을 강조하며, 역사 왜곡 세력에 맞서 공정한 위치에서 정직한 역사를 글로 남기고자 쉼 없이 노력하였다. 민족사연구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남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우리 역사의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이 평전이 박은식의 국혼사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더불어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며 국혼의 상실을 부르는 사이비 학자들에게 일침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권세보다 국민계몽에 힘쓰다
박은식은 한말 무능부패한 지배층, 여기에 서세동점의 파고가 거세게 밀려와 민족적 위기가 심화되던 시기에 국민계몽과 국권수호 그리고 민족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쳤다. 학문이 깊고 능력이 매우 출중했지만 그에 비해 평생 지낸 관직은 왕릉을 지키며 그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미관말직인 능참봉 6년이 전부였다. 이후 임오군병, 제물포조약, 갑신정변, 동학혁명 등을 지켜보면서 참봉직을 내던지고 어지러운 사회현장으로 뛰어 나온다.
그는 본래 정통주자학자로서 이름을 알렸으나 다양한 학문을 접하며 인식이 변하게 된다. 격변과 격동의 시기에, 다소 고루한 정통 주자학과 위정척사사상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신학문과 신지식의 개화사상에 접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유민권사상가가 된다.
이후 박은식은 언론계에 투신하여 순국할 때까지 국민정신의 계몽과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많은 논설을 썼다. 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국민계몽을 위한 민중교육, 국혼을 지키고자 하는 역사연구와 사론 집필, 실천적인 국권수호운동이 단계적으로 혹은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민족사연구와 민중계몽을 택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여건상 여러 취약점이 있었지만, 의열투쟁, 무장투쟁을 제외하고는 장기적인 민중계몽과 구국의 수단으로 아주 효과적이었다.
박은식이 남긴 사상의 집약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발췌 수록
박은식은 40세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순국할 때까지 27년 동안 민중계몽과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많은 글을 썼다.
그중에 태어난 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소중한 유산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이다. 언론·인물전기와 더불어 역사연구는 그의 중요한 과제이고 본령이고 숙명이었다. 그래서 망명지에서도 국권회복운동 틈틈이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민족사연구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삼은 것이다. “한국통사”의 ‘통사’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닌 ‘아플통’ 자를 써서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비통한 역사’를 쓴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독립쟁취를 위한 혈투의 역사’로 불린다. 한민족의 독립투쟁사를 피를 뽑아 쓰듯 방대한 저술로 완성했으며, 특히 3·1혁명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비중 있게 저술하였다. 두 역사서는 각종 통계와 자료가 풍부하여 일제의 허위자료·통계 수치를 비판하고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에는 박은식의 ‘국혼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 책에는 박은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현대 우리의 역사의식을 깨울 수 있는 두 저서의 내용이 발췌·수록되어 있다. 원문은 순한문으로 적혀 있어 대중이 읽기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더 중요한 대목을 뽑아 번역문으로 실어 누구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27년 동안 그가 집필한 수많은 글이 함께 담겨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은 명저를 곱씹으며, ‘국혼(역사)이 살아 있다면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그의 ‘국혼사상’을 이해하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역사 왜곡은
또 다른 국혼의 상실을 부른다
우리는 지금껏 무수히 많은 외세 침략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런 고난의 역사 속에도 동화되지 않고 꿋꿋하게 민족정체성을 지켜왔다. 이것이 바로 백암 박은식이 지적한 ‘국혼’ 정신이다. 한민족이 강대한 외세에 대항하면서 민족국가를 지켜온 데는 연면한 민족정신이 국민 통합의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앞일을 알 수 없는 망명지에서도 역사연구에 몰두한 것은 곧 우리의 ‘국혼’을 찾고 지키려는 애국정신이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신神(역사)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形(국가)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는 곧 민족정신, 국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큰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정권은 막을 내렸지만 역사왜곡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제식민지 35년의 압제에서 풀리는 동시에 (국토가) 허리 잘린 장애를 겪으면서, 내선일체를 주창했던 사가·언론에 의해 역사가 지배되었다. 하지만 이런 어용학자·논객들은 한 번도 징벌되거나 청산된 적이 없다. 그 결과로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역사와 지성과 양심을 짓밟는 독초가 되어 왔다.
피로 쓴 독립운동사를 친일파(와 그 계열) 후손들이 권력과 재력의 붓으로 바꿀 수는 없다. 역사를 왜곡하면 반드시 역사의 필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박은식의 국혼사상이 역사를 왜곡하는 사이비 학자들에게 일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는 『곡필로 본 해방50년』, 『한국필화사』, 『금서』, 『위서』,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채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이회영 평전』,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안창호 평전』, 『빨치산대장 홍범도 평전』, 『박현채 평전』, 『김근태 평전』, 『독부 이승만 평전』,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위당 정인보 평전』, 『김영삼 평전』, 『보재 이상설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등이 있다. 최근의 저서로는 『조소앙 평전』이 있다.
여는 말_‘국혼’이 무너진 시대에 백암을 찾아서
1장 출생과 성장기
2장 진보 언론인의 길에 나서
3장 민중계몽 각종 학회 활동기
4장 국치 후 중국으로 망명
5장 상하이에 독립운동 둥지 틀다
6장 불후의 명저 ‘한국통사’ 쓰다
7장 시베리아로 옮겨 항일투쟁
8장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 책임 맡아
9장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쓰다
10장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봉대
11장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추대 그리고 서거
12장 역사에 남은 명저
닫는 말_역사 왜곡은 또 다른 국혼의 상실을 부른다
주
안중근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도 영웅적인 쾌거였다. 이를 통해 중국인들은 조선(한국)인들을 다시 보기 시작하였다. ‘조선망국노’로 취급하던 중국의 식자들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동정하고 더러는 협력한 경우도 있었다. 박은식은 중국인들과 교유하면서 안중근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박은식은 안중근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10·26 거사’뿐만 아니라 젊어서부터 구국운동·의병투쟁·단지동맹·그리고 적괴의 처단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기록하여 역사에 남기고, 한·중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 P. 83
앞서 소개한 대로 박은식은 언론활동과 관련하여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필봉 때문에 일본헌병대에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오기도 하고, 1910년 유교개혁의 일환으로 『왕양명실기』를 저술하였는데, 최남선이 이를 『소년』지에 전재하였다가 일제가 이를 불온 서적으로 몰아 판매를 금지, 잡지를 폐간시키는 등의 필화를 겪기도 하였다.
- PP. 149~150
박은식의 활동영역은 언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역사, 교육, 대종교활동 등 다양했지만 활동의 중심은 항상 언론을 통한 민족해방 운동이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민족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대단히 진보적인 그리고 실용주의적인 역사관이었다. 여기에 ‘국혼론’으로 식민지 민중을 무장하고자 역사연구를 병행하였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각성시키고 동원하기 위해서는 언론활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 P. 152
권력의 속성 탓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위정자들은 그 자리에 앉으면 권력강화와 연장을 위해 음모를 꾸미거나 위법적인 행위를 일삼는 데 비해 박은식은 짧은 기간에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은 개헌을 통해 권력을 분산시키고 지체 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P. 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