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하의 유랑예인 60년

by anonymous posted Oct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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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하의 유랑예인 60년(RGB).jpg


도서분류 예술/ 예술일반

도 서 명 지운하의 유랑예인 60

지 은 이 지운하 구술, 서종원·이영재 지음

출 판 사 채륜

정 가 20,000

발 행 일 20151110

상세정보 반양장, 296, 신국판(153mm×225mm), 높이(15mm)

I S B N 979-11-86096-18-5 03600

 


책소개.png

지운하 명인의 예술인생 60년을 기리는 회고록의 탄생

196921사 군악대에 입대하여 전방은 물론 월남전까지 위문공연을 다녔던 시절, 월남전에서 장구가 없어서 쎄리이션박스(C-Ration Box)로 장구통을 만들고 판초우의를 가죽처럼 대신해 즉석 장구를 만들어 연주했던 지운하 명인. 어떠한 상황에서도 연주를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열정, 그 순발력은 70년 가까이 남사당놀이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70세 가까이 현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오직 한 길을 걸어온 선생의 헌신이 오늘날 남사당놀이를 더욱 발전시켜왔다.

10차례가 넘는 인터뷰를 통해 지운하 명인의 출생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남사당이란 단체 에서 활동을 하고 선운각과 워커힐 등에서 공연을 하며 세계에 풍물을 알린 후 현재 고향 인천으로 돌아오기까지의 희로애락을 한 권에 담았다. 쉽지 않은 구술채록 과정이었지만 60년 예인생활 의 실감나는 이야기가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길 바란다.

 


출판사서평.png

남사당의 전문기예를 이어가는 외줄기 인생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은 부모님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된 배경과 6,25 전쟁 시 피난 이야기, 남사당에 입문하게 된 계기,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해 인기상을 받았던 이야기 등 주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2장에서는 인천의 대성목재 단원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시장판과 지역을 다니며 펼쳤던 다양한 공연 이야기가 흥미를 더하고 있다. 3장은 결혼과 군대이야기, 그리고 처음 맛본 해외 공연 이야기와 함께 선운각과 워커힐에서의 활동하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 이후는 남사당과 함께 살아온 희로애락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지역에 봉사하는 내용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사당의 일원으로 남사당을 위해 평생을 다한 한 예인의 실감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함께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부디 고향땅 인천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예인의 생활이 남을 위하고 지역을 위하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국악활동을 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책

한평생을 예인으로 살아왔지만 지운하 명인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연구는 많지 않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두 사람, 현재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수자이자 강서지부장으로 왕성히 활동 중인 이영재 영울림 예술단장과 전 단국대학교 연구교수이자 현재 한중대학교 초빙교수로 중앙대학교와 성결대학교에 출강 중인 서종원 문학박사가 함께 힘을 합쳤다. 이 책은 국악분야에서 풍물과 연희를 전공하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지은이.png

지운하

지운하 명인에겐 남사당 꼭두쇠란 명칭이 늘 함께한다. 남사당은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변화 가 많은 시기에 우리가 한민족임을 확인해 준 단체 이다. 버거운 현실의 슬픔을 극복하고, 우리네 고유 한 신명을 끄집어내 준 단체가 남사당인 것이다.

남사당을 위해 평생을 다한 그는 일본, 동남 아시아, 유럽, 미국, 캐나다 등 20여 개국을 다니며 한국의 풍물을 세계에 알려왔다. 풍물놀이가 다시 화려한 꽃을 피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현재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전수교육조교로서 사단법인 유랑의 이사장을 겸임하며 계양구립풍물 단에서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이영재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수자이자 강서지부장으로 왕성히 활동 중이며 영울림의 예술단장으로 있다.

 

서종원

전 단국대학교 연구교수이자 현재 한중대학교 초빙교수로 중앙대학교와 성결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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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따라간 지운하

 

들어가며

지운하가 걸어온 길

축사(서한범, 김덕수, 채치성, 윤중강)

 

첫 번째 무대_지운하 예인의 꿈을 꾸다

두 번째 무대_남사당 회원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다

세 번째 무대_새로운 예술무대를 경험하고 개척하다

네 번째 무대_남사당으로 국내외 무대를 평정하다

다섯 번째 무대_수장으로 남사당보존회의 발전을 도모하다

여섯 번째 무대_이사장직에서 물러나 고향 인천의 품으로 돌아오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_남사당 풍물놀이 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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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하 명인에게 영향을 준 아버지 지동옥은 인천으로 이사를 오기 전부터 고향인 태안에서 상쇠역할을 하면서 두레패를 이끌었다. 마을의 지신밟기며 안택고사는 그의 몫이었다. 특히 목소리가 좋아 집을 지을 때 부르는 지경다지기와 초상이 날 때 부르는 상여소리도 그가 담당하였다.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공연을 펼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P.60

지운하 명인을 주변 사람들은 남사당의 산증인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다.

지운하 명인은 1964년도에 심우성 선생을 중심으로 한 남사당보존회4 가 결성되던 과정을 직접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지정, 그리고 남사당의 최고의 자리인 꼭두쇠까지 역임을 하였다.

P.165

초창기에는 소규모로 진행하다 행사가 의미도 있고 여러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하다보니 몇 군데에서 협찬을 받기도 하였다. 받은 돈으로 현수막도 만들고 수상무대도 설치하여 남사당 회원들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 당시 지운하 명인은 많은 걸 생각하였다. 국악을 비롯해 남사당이라는 전통문화가 나아가야 할 길이 이러한 길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남사당의 대중화에 매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지운하 명인은 오랫동안 해변캠프를 운영했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해 무척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하였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대중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지운하 명인은 국립국악원과 남사당 이사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풍물캠프 등을 진행하면서 남사당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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