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패자의 역사
저자 구본창
저자 연락처:016-775-9551
분야:한국사, 한국역사인물
발행일:2008년 3월 25일
ISBN 978-89-960140-1-0 03910
신국판(152mm×223mm), 반양장, 274면, 12,000원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인가!
우리는 역사를 정확히 인식하고, 비판 없이 절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이제 수많은 인물의 왜곡된 사실을 낱낱이 파헤쳐보자!
역사를 반드시 이분법적 사고만으로 나눌 수 있을까? 같은 사건, 같은 인물이라도 누구의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만을 배워왔기에 편향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런 시각을 뒤집으려는 시도다. 역사 사건을 재구성하여 패자의 입장으로서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기록으로의 역사, 즉 승자의 기록만으로 구성되어 오던 우리 역사를 다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아직 승자의 자손들이 집권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 근현대사조차 재조명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런 시도들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진보적인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식민지 사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존의 역사학에 조금씩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고답적인 문헌연구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구조적 분석을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많은 움직임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도 그러한 시도 중 하나다. 다만 역사를 중립적인 지식인의 시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대끼고 살아온 일반 백성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려 노력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서 당연하게 여겼던 백제의 의자왕과 삼천궁녀, 김유신의 삼국통일, 고려시대의 민란, 조선시대의 항일투쟁사, 우리가 알고 있던 독립투사들의 진실에 의문을 던지며 이 책을 읽어본다면 꽤 흥미로울 것이다.
역사를 비판 없이 그대로 믿을 것인가!
역사를 규명할 때, 과거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볼 수도 없기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기록인 사서史書는 사실을 규명할 때 중요한 판단자료가 된다. 하지만 사서에 대한 맹신은 정확한 사실 규명을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역사가가 기록한 역사라 할지라도 주관이 개입할 수 있으며, 한 시대의 평가를 개인의 기록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도 김부식이 1145년에 기록한 책이다. 백제가 멸망한 후 무려 485년 뒤에 기록한 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실이 삼국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믿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사서는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일 뿐이며,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을 역사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과학적이며 식민 사관의 잔재일 뿐이다.
세뇌당한 역사의식에서 탈피하라!
우리 사학계는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만을 역사로 인정하는 것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소위 ‘사서 지상주의’에 빠져 우리 역사 중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는 민중항쟁의 시도들에 대한 연구를 역사에서 완전히 제외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이 기록한 국사교과서는 당연히 권력의 변화를 설명하는 역사였고, 왕조의 변천사가 중심적인 역사였다. 왕조에 대항한 모든 사건은 획일적으로 ‘난’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4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시민혁명을 이루지 못했고, 우리 역사는 늘 주류의 입장을 설명하는 역사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일부 역사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늘어지는 ‘왕조실록’도 당시의 사관들이 왕의 명을 받아 쓴 기록인지라 정권 합리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또 역사 기록자의 주관이 상당 부분 개입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역사학이여, 박물관을 박차고 거리로 나오라!
우리 역사는 왕조와 정권은 수없이 교체되었어도 결국은 늘 기득권자들에 의해 움직여온 주류主流의 역사였다. 그러한 연유로 주류의 시각으로 바라본 역사만을 배웠고, 또 체제 순응적인 역사만을 배웠다. 더구나 일제 36년을 거치는 동안 조선 총독부의 적극적인 주도와 친일 사학자들이 만든 식민 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역사 왜곡까지 덤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제 역사는 ‘우리의 역사는 찬란했다’라는 추상적인 자부심만을 전해주는 역사에서 탈피해야 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삶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하는 살아있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삼천 궁녀는 완전한 허구
660년 7월 18일, 신라와 당의 연합군 18만 명이 사비성까지 밀고 들어왔다. 황급히 왕궁 뒤 부소산으로 피한 삼천 궁녀는 추격해 오는 적군에게 쫓겨 마침내 낙화암에 서게 되었다. 적에게 치욕을 당할 것인가? 죽음을 택할 것인가? 삼천 궁녀는 선택의 기로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슬픈 최후다.
삼천 궁녀로 상징되는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으로 백제는 점점 힘을 잃었고, 마침내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었다. 이것이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 온 백제 역사다. 그런데 정말로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두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을까?
결론을 말하면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의 상징인 삼천 궁녀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삼천 궁녀의 존재가 허구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 백제 멸망 당시 수도인 사비성 인구는 5만 명에 불과했다. 당시 남녀 구성비를 반반으로 볼 때, 여자는 2만 5천 명이다. 그 중에 궁녀가 될 수 있는 연령대인 15~25세 여자는 몇 명이나 되었을까? 연령대별로 고르게 분포했다고 가정하면 약 4천 명 정도다. 그런데 그 중 3천 명이 궁녀였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당시 사비성의 인구를 따져보면 삼천 궁녀는 전혀 근거 없는 허구일 뿐이다.
둘째, 현재 충남 부여에 남아 있는 당시 왕궁 터의 넓이를 따져 봐도 삼천 궁녀의 존재는 허구다. 왜냐하면 당시 왕궁 터의 넓이가 3천 명의 인원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당시에 궁녀가 아무리 공간을 아껴 썼다 해도, 3천 명을 수용할 공간으론 불가능하다.
셋째,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 어느 곳에도 의자왕의 삼천 궁녀에 대한 기록이 단 한 건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천 궁녀에 대한 이야기가 생겨났을까?
의자왕과 삼천 궁녀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천 년이 지난 조선 중기 문인들의 시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삼천 궁녀의 존재가 대중에게 인식된 것은 일제시대 대중가요에 삼천 궁녀란 가사가 들어가면서였다. 나라 잃은 삼천 궁녀의 비극적인 소재가 일제시대의 우리 정서와 비슷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 애창곡이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삼천 궁녀는 점차 실존했던 존재인 것처럼 대중의 머릿속에 새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연의 소치라 해도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7~18페이지
저자 구본창은 1963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했고, 재학시절부터 한국의 빈민층 형성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한 역사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민중사관에 관심이 많은 지인들과 <대중 역사 연구소>를 설립, 운영하여 친일사관의 잔재가 정리되지 않은 기존의 주류 역사학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를 통해 올바른 역사인식 확산을 위해 노력해왔다. 생계 대책을 위해 십 수년간 대입 재수생들의 영어강사․영어참고서 저자로 활동했고, 현재는 일산의 세종국제 학원에서 국제중을 준비하는 초등생들에게 시사역사 강의를, 그리고 김포의 영재사관 학원에서 국제고를 준비하는 중학생들에게 영어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강의 영문독해, 조이풀 잉글리시,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영어책, 말하는 솜씨로 부자가 된 사람들 등이 있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_역사학이여, 박물관을 박차고 거리로 나오라!
제1부 승자가 왜곡한 역사적 진실들
백제의 의자왕은 삼천 궁녀를 둔 적이 없다
삼천 궁녀는 완전한 허구
너무도 억울한 의자왕
백제 멸망의 원인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복군주 의자왕
백제 멸망의 결정적 이유
삼국통일! 당나라 주연, 신라 조연의 드라마!
당과 신라의 관계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쟁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은 넌센스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자리 잡게 된 배경
신라의 삼국통일론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
국사교과서에서 말하는 삼국통일의 의의에 대한 반박
김유신, 그는 위대한 장군인가?
천관녀 일화를 통해 바라본 김유신 장군
고정관념을 깨야 참모습이 보인다
노비 신분해방을 외친 만적
사람이 아니었던 고려시대 노비들
노비와는 무관했던 광종의 노비안검법
혁명의 횃불을 치켜 든 노비 만적
만적의 혁명에 대한 평가
만적이 역사적 주목을 받지 못해 온 이유
토지개혁을 단행했던 개혁군주 공민왕
공민왕의 귀국과 개혁의 시작
원의 몰락 조짐과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시도
공민왕에게 이용당한 신돈
공민왕의 갑작스런 죽음과 개혁의 좌절
백성들의 눈에 비친 신돈은 미륵불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 신돈
철저한 비주류였던 신돈
신돈의 개혁 추진
위에서 시작한 개혁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연산군의 폭정에 맞선 유일한 신하는 선비가 아니라 내시였다
일곱 명의 왕을 섬긴 내시 김처선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
정여립의 난은 조선왕조 최대의 정치조작사건
왕위 세습을 부정한 학자, 정여립
정여립 사건에 대한 조선왕조의 발표 내용
정여립 사건의 파장
정여립 사건의 조작 의혹
정여립에 대한 평가
선조는 이승만에 버금가는 비열한 군주였다
임진왜란을 맞은 선조의 나약함과 비겁함
선조가 의병장들을 죽이려 한 이유
의병장 김덕령의 죽음
이순신 전사설에 대한 의혹
광해군은 개혁군주로 재평가 받아야 한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오해들
광해군의 중립 외교
광해군의 대대적인 궁궐 복구
인목대비의 폐비사건
인조반정의 실질적 원인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
광해군과 노무현의 공통점
조선시대 북벌론, 왕권은 안정됐지만 백성들은 더 죽어났다
인조의 극단적인 반청(反淸)감정이 부른 화
효종의 북벌 추진
북벌에 대한 평가
북벌이 실패한 이유
조선후기의 불운한 혁명가, 홍경래
홍경래 혁명이 발생하게 된 배경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홍경래와 농민군
홍경래 혁명의 역사적 재평가
평화통일을 주장해 사형 당한 조봉암
진정한 중도파 조봉암
진보당 사건
중도파의 비극
제2부 지배계층이 기만한 역사적 사실들
조선의 신문고, 일반 백성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신문고가 생겨난 배경
신문고, 일반 백성에겐 그림의 떡
누가 조광조를 개혁가라 하는가?
힘 있는 신하 박원종, 힘 없는 왕 중종
중종과 조광조의 동상이몽
조광조는 유교 사상의 또 다른 전도사였을 뿐!
이율곡은 실제로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을까?
시무육조와 비변오책
10만 양병설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
서인들의 개인문집에만 언급된 10만 양병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결, 권력투쟁의 대리전이었다
정경유착이 만들어낸 스타, 장희빈
장희빈 대 인현왕후, 권력투쟁의 대리전
숙종이 진정 사랑한 것은 왕권이었을 뿐
조선의 암행어사제도,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암행어사제도의 탄생 배경
암행어사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양반 의병운동은 진정한 애국운동이라 볼 수 없다
구한말 양반 유생의 의병운동 양상
양반 유생 의병운동의 근본적 한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더 이상 우리의 민족대표가 아니다
3,1운동이 일어난 배경
3,1운동의 숨은 희생자, 조선인 고등계 형사 신철
3,1운동의 전개 과정
민족대표 33인의 무책임과 비겁함
33인의 변절과 똥통을 뒤엎은 만해 한용운
3,1운동에 대한 냉철한 평가
3,1운동이 실패한 내부원인
3,1운동이 실패한 외부원인
조선물산장려운동, 왜 기만적일 수밖에 없었을까?
최초의 국산품 애용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과 민족개량주의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실패한 진짜 이유
독립협회의 회장은 매국노 이완용이었다
독립문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
너무나 엽기적인 독립협회 인사들
독립협회 주도층의 사상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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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우리 현대사를 일그러뜨린 주범
국사교과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친일 청산 이야기
외세에 의해 맞이한 8,15 해방
친일파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무자비한 방해 공작
프랑스의 나찌 청산과 한국의 친일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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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피밭에서 피어난 박정희의 경제개발 신화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전쟁터
반외세(反外勢)로 점철된 베트남 역사
베트남 민중들의 선택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의 베트남 참전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 최대의 정치조작 사건
1, 2차 인민혁명당 사건
인혁당 사건의 조작 근거
억울한 죽음, 뉘우칠 줄 모르는 가해자들
이 책을 맺으며_세뇌당한 역사의식에서 탈피하기